오늘 잊 지 ~말자~ 6월25일

2024. 6. 25. 20:09정부지원,혜택,대출/정부지원,혜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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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오늘 6월25일 잊 지 말아야 할 전쟁 기념일 인데? 뉴스에도 안나 오네?

*https://theme.archives.go.kr/next/anniversary/anniversary.do?anniversaryId=9842000000
*https://ko.wikipedia.org/wiki/6.25_전쟁
 *https://blog.naver.com/feel_kict/223134817399
*오늘은 6월 25일로, 한국전쟁(625 전쟁)이 발발한 날입니다. 
*1950년 6월 25일에 시작된 이 전쟁은 한반도 역사에서 중요한 사건 중 하나로, 많은 이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이 날을 기억하며 전쟁의 아픔과 평화의 소중함을 되새기는 것이 중요합니다.
*https://namu.wiki/w/6.25%20전쟁
*https://youtu.be/iE7dFMrtQPM
*전쟁 발발의 직접적인 원인을 굳이 끼워 맞추자면 국공내전에서의 공산군 승리와 애치슨 라인 설정이라고 보면 된다. 다만 스탈린은 김일성의 전쟁 일으키자는 요청을 71번이나 기각시켰다. 몇몇은 애치슨 라인을 알게 된 스탈린이 미국이 개입하기 전에 한국을 공산화시키는 방향으로 생각하고 결국 김일성의 남침을 허락하는 상황으로 끼워맞춘다. 그러나 이미 과거 소련의 비밀 문서가 공개된 후 애치슨 라인의 설정이 6.25 전쟁 발발에 끼친 영향이 미미한 것이 밝혀진 시점에서 애치슨 라인 가설은 모두 유보되고 있는 실정이다.


*참고로 6.25전쟁 이전에 국지전의 존재는 역사적 사실이다. 국방부 소속 연구소 편찬 '한국전쟁사'에서도 국군이 북한군의 대대적인 공세를 국지전으로 오판한 이유도 1945년 해방 이후 지속된 국지전으로 인한 것이라 평가하고 있다. 또한 국군의 초기 대응이 늦어진 점 대표적으로 당시 제8보병사단이 북한군을 좀 더 효율적으로 막지 못한 이유로 당시 8사단의 작전 지역인 태백산맥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빨치산과의 분쟁 때문이라고 서술하고 있다. 당연히 그 중에는 북한 특작대도 있었다.


*정병준 교수의 연구에 의하면 38도선을 중심으로 하는 국지전은 지속되고 있었다. 국지전은 6.25 전쟁의 원인 중 하나일 뿐이지 국지전이 6.25 전쟁의 시발점이라고 평가하지는 않는다. 다시 말해, 6.25 전쟁의 시작이 북한의 대대적인 기습 남침이라는 점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참고로 이건 미국의 주장이 아닌 소련의 주장이다.(KGB문서 공개)


*엄밀하게 군사적인 개념으로만 보자면 북한 정권과 그 후원자인 중국은 제대로 한 셈이었다. 당시 한국은 미국에게 우선적인 핵심 국가가 아니었다.

*그런데 북한 정권과 중국이 간과한 게 있었다. 만약 미국이 우방인 남한의 편에 서지 않으면 전 세계 다른 국가들의 신망도 잃을 수 있다는 점을 미국이 주지하고 있었다.

*냉전의 정점에서 혹시라도 미국의 동맹들이 양다리를 걸치거나 공산 진영으로 갈아타기라도 하면 미국의 세계 전략은 심각한 위험에 빠질 수 있다. 미국의 전략은 동아시아와 동유럽을 동일 선상에서 다룬다. 예컨대 폴란드, 발트 해 국가들, 일본 그리고 필리핀 등은 러시아와 중국과의 관계를 정립하는 데 있어 미국이 자신들 뒤에 버티고 있음을 확신할 필요가 있다.

2. 남침의 주도자들

*북한>>
*김일성: 소련의 스탈린에게 남침을 허가해달라고 끈질기게 설득해서 전쟁을 일으켜 북한 영토와 주민 전체를 도박판에 올인. 자신의 선제 남침을 숨기기 위해 자신이 전쟁 준비를 하고 있다는 것을 최측근 인사들을 제외하고 철저히 숨겼다. 
*직책>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위원장 & 내각 수상.

*박헌영: 정치적 세력을 유지하기 위해 6.25 전쟁을 적극 추진하던 김일성에게 전쟁을 일으키면 남로당원 20만 명이 봉기할 것이라는 등의 충격적 발언들을 했다. 김일성이 스탈린 등과 전쟁 논의를 할 때 박헌영은 김일성과 함께 행동했다. 
* 직책>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부위원장 & 내각 부수상 & 외무상.

*김책: 개전 초기 총참모장 강건과 함께 중서부 전선의 북한군 침공 작전을 계획해 서울을 3일 만에 함락, 이를 기념하기 위한 퍼레이드에 직접 참여했다. 이후 충청, 전라 지방을 점령하는데도 성공해 충청북도 충주에 있는 수안보에 북한군 전선사령부를 세우지만, 다부동 전투에서의 큰 피해, 유엔군의 인천 상륙작전 성공 등의 악재가 겹치면서 유엔군의 기세에 밀려 조치원을 통해 간신히 포위망을 뚫고 후퇴했다.

*김광협: 낙동강까지 밀어붙인 북한군 지휘관. 결국 낙동강 방어선을 뚫는 데 실패하고 인천상륙작전이 전개되자 김일성으로부터 문책을 당했다.

*방호산: 6.25가 발발하자 6사단은 국군 1사단이 담당하던 서부전선 쪽에서 쳐들어왔다. 개전하자마자 옹진반도와 해주의 국군병력을 순식간에 패퇴시켰다. 개전 사흘만인 27일에 김포반도를 점령했다. 남한 국민들에게는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겼는데, 바로 6사단이 남진하면서 점령한 충남, 전라도 전역, 경남 서부에서 수많은 인민재판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강건: 6.25가 발발하자 총참모장으로 북한군을 이끌다가 9월 8일 고향에서 멀지 않은 경상북도 안동시에서 지뢰 폭발 사고로 사망했다.

*리승엽: 당장 전쟁 당시 북한이 서울을 점령한 이후 서울시 인민위원장(서울특별시장 격)으로 활동했으며, 인천상륙작전 이후에도 패잔병을 모아서 유격전과 지연전을 펼치다가 후퇴했었다. 당시 인천상륙후 유일하게 UN군과 국군과 대치했다.

*소련>>>
*이오시프 스탈린: 스탈린이 김일성의 침략 요구를 71번이나 거절한 것은 사실이다. 중국의 공산통일과 애치슨 라인에서 한반도가 제외되는 일련의 사건을 통해 그 시기가 되었다고 판단해 승인해준 것. 김일성이 떼써서 전쟁을 허가해준 것은 아니다. 천하의 마오쩌둥도 스탈린의 명령앞에서는 설설 기었는데, 김일성 따위가 생떼를 쓴다고 들어줄 위인이 아니었다. 스탈린은 김일성에게 남한을 침략할 목적으로 탱크, 박격포, 야포, 대전차포, 장갑차나 기총 등의 무기들을 남한을 압도할 만큼 제공하고 훈련시켰다. 그에 비해 당시 남한에는 탱크가 단 1대도 없었던 상황이었다.

*테렌티 시티코프: 소련군정 사령관을 역임했고, 김일성의 침략을 적극적으로 도운 인물.

*중국>>
*마오쩌둥: 모택동은 김일성을 적극적으로 도와주기로 했으며 이는 김일성이 스탈린을 설득하는데 영향을 준다.

*펑더화이: 모택동의 명령에 의해 김일성을 도와줬다. 총사령관을 했다.

*쑹스룬: 모택동의 명령에 의해 김일성을 도와줬다. 팽덕회의 부장(副將).